에세이 한 편

박덕은_수필집『바닥의 힘』/ 아픔에 가닿아야 한다

검지 정숙자 2023. 9. 17. 01:34

<에세이 한  편>

 

    아픔에 가닿아야 한다

 

     박덕은

 

 

  일부러라도 내게 맞지 않는 상대방의 신발을 신어 봐야 한다. 그의 가방을 메고 길을 걸어볼 필요도 있다. 발뒤꿈치에 물집이 잡히고 어깨를 짓누르는 통증을 겪게 되면, 아픔이 다르게 느껴진다. 진정한 이해는 상대방의 가장 어두운 아픔에 가닿을 때 이뤄진다.

  눈을 맞으며 친구의 집으로 걸어갔다. 한때 샘물이었을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구멍 뚫린 울타리는 바람이 드나드는 상처를 흰 붕대로 감쌌고, 길가의 돌멩이들은 하얀 고깔모자를 쓰느라 깔깔거리고 있었다. 이제 겨울만 지나면, 친구와 나는 대학생이 된다. 함박눈처럼 분홍 꽃빛이 펑펑 내리는 봄날 속으로 우리는 걸어갈 것이다.

  기찻길 위에 나 있는 뽕뽕다리를 지나, 친구 집에 다다랐다. 의외에도 대궐 같은 기와집이었다. 고풍스런 소나무마다 우듬지 가득 하얀 고봉밥이 쌓여 있었다. 한눈에 봐도 부잣집이었다. 그는 나랑 여태 친한 친구로 지내면서도, 내게 단 한 번도 자기 집과 가족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 집에 놀러간 사람은 아마도 내가 처음인 것 같았다. 집안에 들어서자 나는 매우 놀란 눈길로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봤다. 그만큼 잘 사는 집이었다. 난 솔직히 그가 매우 가난할 거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봤던 그의 모습은 옷을 기워 입어도 곧바로 터지는 솔기처럼 늘 의기소침해 있었다. 친구들과 좀처럼 어울리지도 않았다. 잘 웃지도 않았고, 틈만 나면 잠을 잤다. 쉬는 시간뿐만 아니라 수업 시간에도 맨날 졸고 있었다. 마치 잠자기 위해 학교에 온 것처럼. 그는 잠을 자다가 일어나 도시락을 까먹고, 잠을 자다가 일어나 집으로 갔다.

  늘 그렇게 흐릿한 눈빛으로 지내던 그가 뜨거운 불길이 들어온 아궁이처럼 열기 띤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내가 그린 그림 보여줄게.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어. 너가 처음이야."

  "기대되는데."

  미술대 입학을 앞두고 있는 그는 집 뒤꼍으로 나를 이끌었다. 왜 그림을 방에 걸어두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꾹 참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풍경화일까, 인물화일까. 몹시 궁금했다. 상당히 긴 뒤꼍의 외벽에 그의 그림들이 쭉 진열되어 있었다. 그림의 사이즈가 엽서만 한 것에서부터 4인용 탁자 2배 크기의 액자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그림 소재였다. 그림 소재가 한결같았다. 놀랍게도 그 그림은 재래식 화장실인 칙간에 앉아 똥을 누는 모습이었다. 그것도 똥 한 덩이가 뚝 떨어지는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었다. 거기 걸린 크고 작은 12점 모두 그림 내용이 똑같았다. 순간 가면을 쓰지 못한 나의 눈은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그만 찡그리고 말았다. 그가 언짢아할까 봐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와 지금 내 눈앞의 그가 동일 인물인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는 나와 무관하게 완벽한 타인인 것처럼 느껴졌다. 볼일만 보고 재빨리 빠져나오는 칙간이라는 공간이 왜 그에게는 이토록 특별한 것일까. 냄새나고 더러운 똥이 그에게는 왜 소중한 것일까. 그런 그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때, 내 걸작? 너의 그림 평을 듣고 싶어."

  그는 으스대며 내 그림 평을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그 어떤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듯 기쁨을 안겨 주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험한 말도 칭찬의 말도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어, 그냥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그는 빨리 말해 달라고 몇 번이나 재촉했지만, 나는 말 꺼내기를 망설였다. 인사치레라도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얼음 속에 갇힌 것처럼 혀는 도무지 움직여지지 않았다. 대문 밖으로 나올 때쯤,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 해달라고 다시 졸라댔다. 학교에서 익히 보아왔던 그 모습이었다. 너덜너덜 실밥이 터진 헌옷처럼 의기소침한 그 얼굴. 나는 뽕뽕다리 위에서 헤어지기 직전에 이렇게 말해 주었다.

  "저 그림을 우리 집에 걸어놓고 싶지는 않아."

  묵묵히 고개 숙인 채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그를 뒤로하고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의 집에서 조금씩 멀어질수록 우리의 우정도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언 손을 부비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얼어붙기 시작한 우정처럼 추웠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어느 날, 그가 마음의 병이 깊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누구는 그의 집안에 정신병력이 있다고 했고, 누구는 어렸을 때부터 새엄마와 사느라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도 했다.

  어느 날 문득 학교에서 잠만 자는 그 친구가 떠올랐다. 행복했던 시절에 머물러 있고 싶은 그는 귓바퀴 속으로 우루루 들어오는 소음을 밀어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연습장처럼 쓰다 버릴 소리에 귀를 빼앗기기 싫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 번은 그가 이런 말을 했었다.

  "어렸을 때 울 엄마는 내가 똥을 누면, 아이구, 내 새끼 똥도 잘 싸네라고 말하며 나를 안아줬어."

  그가 자랑스러워했던 '똥' 그림이 떠올랐다. 나에게 똥은 짜증, 미움, 분노와 같은 구린내 나는 시간들이었다. 어두운 화장실에서 그런 냄새 나는 시간들을 빨리 처리하고 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똥은 웃음처럼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똥은 엄마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는 느낌표 같은 것. 그렇지 않고서는 그가 12점 모두 '똥'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똥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끝까지 완성할 수 있었을 테니까. 조심스럽게 마음의 문을 열었던 그가 다시 문을 걸어 잠그고 살아갔을 그 수많은 세월, 얼마나 외로웠을까.

  이성복 시인은 "사랑은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배설하는 방식에 숙달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상대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은 어렵다. 지금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함박눈, 저 함박눈도 한때는 시궁창 물이었을 것이다. ▩ (p. 23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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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덕은 제4수필집 『바닥의 힘』에서/ 2023. 7. 10. <한림> 펴냄  

 * 박덕은/ 1952년 전남 화순 출생, 198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1979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 당선, 시집『느낌표가 머무는 공간』 외, 수필집『창문을 읽다』외, 소설집『죽음의 키스』외, 문학이론서『현대시창작법』외, 전) 전남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