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수목장 외 1편/ 정희성(鄭羲成)

검지 정숙자 2023. 9. 10. 01:49

 

    수목장 외 1편

 

    정희성鄭羲成

 

 

  어찌 강물에 뼈마디를 흘리랴

  떠돌았거니 꼿꼿이

  저 비탈진 언덕에

  직근으로 내려서자

  푸른 몸을 다시 입으리니

 

  허혈성 세포로 비틀거리던 시간은

  그만 잊자 물 한 잔 내주고

  덜컥거리던 빈 그릇의

  시간은 그만 잊자

 

  치렁치렁 고단했던 등줄기에서

  푸른 순이 돋고

  이십사 자모 밖의

  식물성 화술과

  푸른 눈

 

  잊혀질 리 없는 별리

  삼만 광년쯤 어느 새벽녘에는

  너와 뿌리에서 뿌리로 만나는

  푸른 등 하나도 켜지리니

 

  어찌 거친 강물에

  너와 나의 한 생을 흐르게 하랴

     -전문(p. 46-47)

 

 

    --------------------------

    아메리카 냄새

     -북방소년장성기 2

 

 

  훈민정음을 깨치면서 거룩한 영어 갓 뎀도 배웠다 눈 파란 양키 장교 어린 딸을 꾀려 초인종을 누르면 매미가 울었다 파벽돌 집 간유리에 담쟁이 손이 출렁이는 걸 두 살 아래 곱슬머리는 서양 귀신이라 우겼다

 

  이모들은 스무 살이 차면 댄스홀로 시집갔다 곱슬머리는 손톱이 긴 어린 엄마와 골목을 떠났고 우린 진종일 눈깔사탕을 빨았다 운천극장 소각장 페퍼민트 껌종이에선 아메리카 냄새가 났다

 

  우린 의정부 다음이 아메리칸 줄 알았다

  가칼봉 너머 동해보다 가까운 줄 알았다

 

  곱슬머리동생이 정말 정말 

  아메리카로 살러 간 줄 알았다

     -전문(p. 56)

 

    ---------------------

   * 시집 『중섭 아재처럼』에서/ 2023. 8. 10. <시산맥사> 펴냄  

  * 정희성鄭羲成/ 1993년『현대시』로 등단, 시집『하귤의 껍질을 벗기며』『지금도 짝사랑』  

'시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풍금새 외 1편/ 송경애  (0) 2023.09.12
계보의 강, 그 얼음 성/ 송경애  (0) 2023.09.12
물속의 잠/ 정희성(鄭羲成)  (0) 2023.09.10
물멍* 외 1편/ 박덕은  (0) 2023.09.09
한참을 망설였다/ 박덕은  (0) 2023.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