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 노트

"화가란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강경호

검지 정숙자 2023. 8. 17. 03:28

 

    "화가란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강경호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e, 1878~1967, 89세)는 그림으로 시를 그리는 시인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캔버스에 재현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세계를 변형하고자, 세계로 하여금 몸을 열게 하였다. 그의 회화는 눈에 보이는 것을 시적이고 마술적으로 배열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 했다. 이러한 배열은 관람자의 시선이 세계의 가장 깊숙한 곳, 몸, 감각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한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현실의 묘사, 즉 세계 속 대상의 현시顯示를 찬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깊숙이 감춰진 본성을 드려내는 그림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p. 15)

 

  밀레「만종」을 X선으로 투과시켜 보면 기도하는 부부 사이에 놓은 바구니 자리에 작은 관이 있다고 한다. 밀레가 이 그림을 처음 그릴 때 죽은 아내의 시신을 담은 관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을 지우고 그 위에 바구니를 그려 넣은 것을 추영희 시인은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랬기 때문에 「만종」이라는 시에서 모순된 현실을 담아냈던 것은 아닐까. (p. 44) / 이 블로그에 추영희의 「만종」이 수록되어 있음

 

  추사 김정희(1786~1850, 70세)는 고조할아버지 김흥경(1677~1750, 73세)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증조할아버지 김한신(1720~1758, 38세)은 영조의 부마, 아버지 김노경은 판서와 한성판윤에 이르는 명문대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등 수백 개가 있지만 완당을 즐겨 썼다. 실학자 박제가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여 벼슬이 형조참판에 이르렀지만, 김우명의 모함에 희생이 되어 9년여에 이르는 제주도 대정에서의 위리안치 귀양살이와 말년에 북청에서 귀양살이를 한 쓸쓸하고 외로웠던 선비이다. (p. 47) 

 

  화가 이중섭(1916~1956, 40세)이 없었다면 그가 살았던 당대의 우리 미술사는 참으로 쓸쓸했을 것이다. 이중섭은 1945년 해방부터 6·25가 터진 때까지 북한에서의 6년과 남한으로 피난 와 활동한 1956년까지의 6년, 즉 12년간의 짧은 활동을 통해 한국미술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40세라는 짧은 일생을 살다 간 이중섭은 놀라울 만한 예술세계뿐만 아니라 그의 생애 또한 결코 간단하지 않은 참담하고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p. 63)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d, 1452~1519, 67세)는 인류 역사상 위대한 천재 예술가의 한 사람이다. 흔히 그를 생각할 때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을 그린 화가를 떠올리기 일쑤이지만, 그는 과학자 · 기술자 · 사상가로 조각 · 건축 · 토목 · 수학 · 과학 · 의사 ·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유년기에 이론교육보다 실용적인 경험을 많이 쌓았다. 포도주 · 기름 · 밀가루를 생산하는 농촌에서 농부의 지식을 직접 흡수하였다. 또한 도자기업을 하는 할머니의 가마에서 온갖 도기, 특히 채색 토기를 구워냈다. 도자기 기법을 익혔던 이러한 체험은 그의 예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p. 85) 

 

  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 37세)는 13세 때 한쪽 다리가 부러졌고, 14세 때에는 남은 다리마저 부러졌다.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그는 성인이 된 후에도 키가 150㎝를 넘지 못했다. 여섯 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는데, 14세 때 두 다리가 부러진 후 유화로 말, 마차, 기수, 개가 있는 로트레크가의 사유지나 사냥하는 모습 등 쉽게 볼 수 있는 귀족적인 분위기를 담아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친구인 르네 프랭스토가 그린 그림을 가르치게 했다.

  이 무렵부터 로트레크는 양다리가 병신이 되어 좋아하는 스포츠와 승마로부터 버림받은 후, 그림 그리는 데 전념한다. 이때 만약에 로트레크가 실의에 빠져 절망하였거나 다리에 부상이 없었더라면 근대미술사의 거장 로트레크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p. 104) 

 

  로댕(Auguste Rodin, 1840~1917, 77세)은 평생 인체를 조각했다. 특히 누드의 여체를 조각했는데, 그가 여인의 누드를 형상화한 것은 그의 신념 떄문이었다.  

  "나는 자연을 미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인간 이외에는 대상으로 삼고 싶은 것이 없다. 인체가 만들어내는 형상은 나에게 다가와 나를 압도해 버린다. 나는 나체를 보면 끝없는 찬미와 깊은 경외심을 느낀다."라고 고백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로댕은 여성의 몸에서 예술적 에너지를 얻었다. 이렇듯 여인의 누드에서 무한한 아름다움을 느낀 로댕은 한 번은 작업이 끝나자마자 사다리에서 내려와 아직도 나체로 누워있는 소녀에게 달려가 배 위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눈을 감고 진실한 표정으로 소녀의 아름다움에 감사를 표하고 찬사를 보내기도 하였다. (p. 128) 

 

  미술계 최초의 팝스타는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 59세)이다. 워홀은 1928년경 체코슬로바키아 이민자의 아들로 미국 펜실베니아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피츠버그의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후 뉴욕으로 진출하여 잡지 일러스트레이터와 광고 디자이너로 일하였다. ⟪글래머⟫ ⟪보그⟫ ⟪하퍼스바자⟫와 같은 패션잡지의 광고를 고안하는 전문적인 그래픽 디자이너로 성장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그가 즐겨 이용하는 드로잉 기법은 매우 섬세하였다. 1956년 매디슨 애비뉴의 전시회에서 완전히 금색 구두 연작이 전시되었고 이것은 흥미를 느낀 심리학자들의 굉장한 관심을 이끌어냈다. (p. 142) 

 

  쇠라(1859~1891, 32세)는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했는지 지금껏 실천해온 스스로의 예술에 대해 그 원리를 기록하였다.

  "예술, 그것은 조화이다. 비슷한 색조라든가 선의 아날로지이다. 색조는 밝은 것에서 어두운 곳으로의 추이, 색채라는 것은 적색과 녹색, 오렌지와 청색, 황색과 자색의 보색관계인 것, 선이라는 것은 수평선을 축으로 하는 방향성을 의미한다. 이런 여러 색의 조화가 결합하여 고요함, 명랑함, 또는 슬픔 같은 것이 생겨난다. 이러한 표현 수단은 색조외 색채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그들 반응의 시각혼합이다." 쇠라가 평생 추구해 온 빛과 색채에 관한 미학이다.

  신인상주의의 기수 쇠라는 1891년 3월 29일 전염성 후두염으로 32세의 젊은 나이에 자신의 예술세계를 더 이상 펼쳐 보이지 못하고 요절하고 말았다. 짧은 삶을 살다 갔지만 신인상주의 화가들은 물론 입체파, 미래파 등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탄생에 영향을 미치면서 세잔과 함께 20세기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열어 그의 예술은 그가 추구했던 것처럼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을 살고 있다. (p. 159-160) 

 

  고야(1746~1828, 82세)의 그림에는 시적인 요소가 깃든 것들이 많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맞서 싸운 스페인 마드리드 시민들의 모습을 담은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 「거인」, 시간의 신 크로노스와 노파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시간과 노파들」, 죽은 자의 몸에 피를 뽑아내고 있는 마술사들을 그린 「마술사와 공중부양」, 여성 인권 신장을 풍자적으로 그린 「꼭두각시」, 가면을 쓰고 춤을 추며 행진하는 마드리드의 카니발을 표현한 「정어리 매장」, 그리고 귀머거리가 된 후 그린 이른바 '검은 그림'들(46세 때 콜레라에 걸려 고열 때문에 청력을 잃어버렸다. 이 책 P. 173)이 그것들이다. 그런 까닭에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화가임에도 많은 시인이 그의 그림 이미지에서 영감을 얻어 시로 형상화하였다. (p. 175-176)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56세)는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가난한 귀금속 세공사인 에른스트 클림트와 안네 핀스터 사이에서 7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보헤미아에서 온 이민자로 판화가로도 활동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동생 에른스트도 세공사였는데 1892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클림트와 공동작업을 했다.

  클림트는 14세 때 빈의 장식미술학교에 입학해 7년 동안 그의 동생 에른스트와 친구 프란츠 마치와 수업하였다. 학교에서 모자이크, 프레스코화에 이르는 다양한 기법을 익혔다. (p. 190) 

 

  서구 미술이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이식된 후 가장 한국적인 서정을 화폭에 담은 화가는 단연 박수근(1914~1965, 51세)이다. 우리나라에 인상주의가 도입되어 많은 작가가 이에 경도되었지만, 그는 인상주의를 비켜갔다. 51년이라는 길지 않은 생을 가난 속에 온몸이 노출되면서도 그는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하였다.

   (···)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면 정림리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집안은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고 있어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다. 그는 다섯 살 때 서당에 들어가 천자문을 배웠다. 일곱 살이 되면서 양구보통공립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아버지가 광산업에 손을 대었다가 실패한 후 양구읍내에 시계 점포를 내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곤궁해졌다. 그런 까닭에 미술학교에 진학하려던 꿈을 포기하여 보통학교 졸업이 그의 학력 전부가 되었다. (p. 207 (···) 208) 

 

  현대회화를 말할 때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 67세)은 가장 윗자리에 차지한다./···/ 세잔은 인상파로 출발했지만, 곧바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그가 인상파에 몰입했던 것은 회화의 본질처럼 되어버린 역사 · 신화 · 기독교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려온 기존의 회화 질서를 부정하고 자신의 느낌대로 그림을 그린 화가들의 그림에 대한 이해가 자신의 예술적 기질과 맞은 까닭이다. 모든 사물에는 자신만의 색채가 있다는 기존의 인식을 파괴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양과 빛의 위치에 따라 사물의 색채가 변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세잔은 1839년 1월 19일, 남프랑스의 엑상 프로방스에서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거의 아버지 루오 오귀스트 세잔은 모자 판매상이었다가 은행을 설립하여 에밀졸라, 장바티스트 바유와 함께 단짝 친구가 된다. 돈밖에 모르는 아버지의 뜻대로 엑스대학의 법학과정에 마지못해 입학하지만, 법학을 포기하고 그림에 대한 열정을 이어간다. (p. 223 (···) 224) 

 

  고갱은 세잔처럼 피사로에의 영향을 받아 인상주의에서 출발해 인상주의를 넘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종합주의와 클루아조니즘(Cloisonisme) 을 탄생시키고 상징주의로 귀착한 이단아이다. (···) 모네가 근대화되어가는 도시풍경을 그릴 때 고갱은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남태평양 타히티섬에서 원주민들과 함께 살며 강렬한 충격을 주는 그림을 그리다가 마르키즈제도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 55세)은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르 구역, 노트르담 드 로레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자였고, 어머니는 스페인과 페루 혈통의 여성이었다. 고갱이 1세가 될 때 가족이 페루로 이주하여 6년간 그곳에서 살았는데 이때 보고 들은 이국의 풍광과 관습은 고갱의 가슴 속에 깊이 각인되어 그의 작품에 자양분이 되었다. 7세 때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는 누이와 그를 데리고 프랑스로 돌아와 오를레앙에 정착했다. (p. 241)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1901년 10월 10일(1901~1966, 65세), 이탈리아 국경에서 가까운 스위스 보르고노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반니 자코메티(1863-1933, 70세)는 스위스에서 명성을 떨친 후기 인상파 화가였다. 그는 아들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있도록 예술적 환경과 재정을 아낌없이 지원하였다. 그는 "화가란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미술을 공부한다는 것은 보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고 알베르토 자코메티에게 가르쳤다. '화가가 실체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능력을 길러야 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아버지와 아들은 예술과 작품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를 나눈다. 

     (···)  

  자코메티는 모델을 앉혀놓고 조각 작업을 많이 하였다. 이때 그는 모델을 재현하고 옮기고 복사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델과 싸우고 투쟁하는 것의 반복을 통해서 인간의 본질을 추구했다. 그러므로 그가 만든 조각을 통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얼굴과 신체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본질이다. 다시 말해 그는 현상이 아니라 현상 뒤에 존재하는 의미를 추구했다.

  그런데 얼굴이나 신체 뒤에 숨어있는 것은 허공일 뿐이다. 얼굴이 얼굴일 수 있는 것과 신체가 되기 위해서는 이 빈 공간 속에서 빈 공간과 같이 움직여야 한다. 빈 공간이 얼굴의 조건이고 신체의 조건인 것이다. 즉 자코메티는 사물이라는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감싸고 사물을 생산하는 공간, 다른 식으로 말해 사물의 근거를 보았던 것이다. (p. 255 (···)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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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경호_평론집 『미술의 상상력을 통한 시적 발화에서/ 2022. 9. 30. <에코미디어> 펴냄

  * 강경호/ 1992년『문학세계』로 평론 부문 & 1997년『현대시학』으로 시 부문 등단, 문학평론집『휴머니즘 구현의 미학』『서정의 양식과 흔들리는 풍경』『문학과 미술의 만남』외, 미술평론집『영혼과 형식』, 연구서『최석두 시 연구』, 시집『언제나 그리운 메아리』『알타미라동굴에 벽화를 그리는 사람』『함부로 성호를 긋다』『휘파람을 부는 개』『잘못든 새가 길을 낸다』, 소리를 주제로 한 에세이집『내 마음의 소리』, 기행 에세이집『다시, 화순에 가고 싶다』『역사와 생명의 고을, 무안』『화순누정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