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홍시율_수상록『마음을 여는 속도』「자유의 용기」

검지 정숙자 2023. 6. 10. 03:02

<에세이 한 편>

 

    자유의 용기

 

    홍시율

 

 

  다양성의 시대에서 행복해지려면 우선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내가 어떤 특정한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을 버릴 필요가 있다. 나이와 직업, 삶의 방향들은 천차만별이고 지역적 습속이나 과거의 관습대로 질문하고 다가오는 사람들도 많다. 정해진 대답을 원하는 상황을 서로가 충돌 없이 비껴가려면 상대방의 의중에 나 자신이 부담 갖지 않는다는 인상을 줄 필요가 있다. 서로의 인생이 다르다는 걸 간과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습속들은 대부분 유교적인 뿌리를 갖고 있는 것들이고 허세를 낙으로 여기는 이들도 많다. 특히 혈연으로 구성된 이들과의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면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정답은 아니다. 도망쳐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에 함께 공존하면서 살아가려면 어느 정도 미움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자유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 적당한 감정적 단절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고 기를 쓰면 상황은 갈수록 더 악화하게 된다. 병 속에 든 사탕을 움켜쥔 채로 손을 빼낼 수는 없다. 내가 미움받는 것은 괜찮지만 상대방이 상처를 받을까 봐 끌려 다니면서 무익한 이야기에 장단 맞추다 보면 오히려 내 상처만 깊어진다.

  관계의 돈독함이 언제나 미덕은 아니다. 인간은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게 되고 누구도 내 삶의 완성에 나 이상으로 적절하게 시간의 그림을 예행하여 주지 않는다. 빛바랜 위로로 활력이 되살아나지도 않는다.

  사이먼 시넥(Simon Sinek)은 뇌는 부정어를 인식하지 못하므로 장애물을 앞에 둔 스키선수가 나무를 피해야 한다는 강박보다는 길을 따라가라는 주문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생의 불편함으로부터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은 나를 더 주눅 들게 할 것이고, 오히려 내 삶을 이끌 긍정어를 향해 나아감으로써 스스로 활력을 만들어낸다. 인생의 길에는 누군가 먼저 뿌려놓은 흰 조약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어두운 계곡의 길에서 지침 삼을 수 있는 빛의 감각을 체득하는 것과 실핏줄 같은 길에서 출구를 찾아나갈 수 있는 본능도 중요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포기하게 된 선택도 있겠으나 어느 누구 때문에 내 선택을 양보했다면 그건 사람이 좋은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이다. 

 

  '좌표가 움직이고 룰이 바뀌며 결승점이 이동하는 무한게임'(인피니트 게임, 사이먼 시넥)에서 길을 잃지 않고 목표를 이루며 앞으로 나아가려면 삶의 짐을 조금씩 덜어내면서 걸어가야 한다. 복잡한 네트워크도 적당히 다듬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만든 것도 있지만 전 세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상속 네트워크도 많고 경조사 용도의 라인도 얽혀 있다. 욕을 먹는 것을 두려워하면 넓은 길로 나아가기도 전에 지치고 만다. 물론 비도덕적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쟤는 원래 좀 그래.'라는 이미지만 심어주는 정도라면 성공이다. 거기에서 절약된 시간을 가지고 자신을 위해 알차게 사용하면 된다.

  말하자면 자유 선언 같은 것인데 가족모임을 나가보면 소위 잘난 사람들은 그런 모임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참석했다가도 얼굴만 슬쩍 비추고는 바쁘다는 핑계로 일찍 자리를 뜬다. 그 자리를 주최한 부모세대의 낯이 있으니 마지못해 얼굴을 비출 뿐이다. 일정 시기가 되면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마움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끌려다니면서 정서에 전혀 맞지 않은 상황을 감내하며 고문 아닌 고문을 받아야 된다. 자기 시대를 살기에도 모자란 시간을 스트레스에 계속 노출시키다 보면 절망감만 커진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시점도 매우 중요하다. 제때 해야 할 일들을 제때 맞춰서 해야 에너지도 적절히 충전되고 시대와의 보폭을 맞출 수 있다. 에너지를 계속 소비하는 현실이 충전 요소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삶의 진행이 적정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것이 늦춰지다보면 인생이 뒤로 밀리게 되고 활력은 되찾기 어려워진다.

  인생에는 분명 자기를 걸어야 할 때가 있다. 나는 아직 그런 적이 없었다고 얘기하는 사람일지라도 자기 정서상의 자연스런 선택이었을 뿐이지 그는 자기 인생을 걸었던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것이 삶의 매듭이면서 사다리이고 전환점이다.

  사업종목 선정이나 계약, 직업의 변경과 이사나 이민도 이에 해당된다.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직장을 갖게 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학과 선택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해왔을 터이지만 막상 그 시기가 되면 인생의 진로에 대한 불안과 설렘이 동시에 찾아온다. 결국은 하나를 선택하고 그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거기에는 당연히 사랑과 결혼도 포함된다. 배우자의 선택은 인생에서 가장 큰 용기와 지혜가 필요한 부분이다. 돈과 외모, 학력과 사회적 배경 등을 보게 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나와 충분히 교감을 이룰 수 있는 상대인가이다. 노력한다고 해도 서로 맞출 수 없는 부분들도 나타나기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서가 가장 중요한 잣대이다. 연애시기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문제들이 결혼 몇 개월이 지나면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된다. 부부싸움을 하게 되는 것은 서로 좋은 모습만을 보이려는 조심스런 노력이 줄어들면서 점차 본래의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많은 부부들이 아주 작은 사소한 문제들로부터 시작해서 삶의 목표와 미래의 꿈에 이르기까지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상태라는 판단을 거쳐 결혼을 무효로 돌리기도 한다.

  사랑에 있어서도 삶의 가능성이 좌절이나 고통으로 바뀌는 일이 생긴다. 젊음의 시간이 충분히 보장된다면 사랑과 결혼도 능숙함과 면밀함이 유지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넉넉하지 않아서 항상 선택의 시간에 쫓기게 된다. 현실의 짐을 미래로 떠넘긴 결과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확인된다. 

  최고의 친구를 칭하는 사자성어들은 많다. 관포지교管鮑之交, 지란지교芝蘭之交, 문경지교刎頸之交, 총죽지교葱竹之交, 수어지교水魚之交, 막역지우莫逆之友, 단금지교斷金之交, 금란지계金蘭之契, 간담상조肝膽相照, 환난지교患亂之交, 복심지우腹心之友 등등이 있다. 그러나 부부 사이는 친구 이상의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하룻밤 사이에 성을 쌓더라도 그 성이 부서지지 않고 평생을 갈 수 있는 사랑 말이다.

 

  인생의 크고 작은 선택들이 결론적으로 나 자신을 걸었던 경험들이었다. 순간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용기를 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고, 용기를 내지 못했던 이유들로 인해 더 진일보한 상태에 못 미치게 된 것이다. 용기는 용기 있게 행동하자는 다짐만으로 생성되지 않는다. 그 용기를 내어야 할 시점이 지금인지에도 자신이 없다. 아무런 토대도 존재하지 않는 허공에서 자기를 걸어야 할 때가 있는데 그 과정을 무사히 넘긴 뒤에야 그것이 용기였다는 게 판별될 뿐이다.

  용기를 내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폴 발레리(Paul Valery)는 말한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고 『해변의 묘지』에서 노래한 그 프랑스 시인이다. 평생 불던 바람의 양태로 보았을 때 하루라도 살아야겠다고 외치지 않은 날이 없는 인생들이다. 운명이 나를 미워하는가 싶지만 그 운명 또한 나와 더불어 나이 들어갈 것이기에 문제를 겨우 해결하고 나면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현상들도 잦아들 것이다.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한 새로운 문제들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의 삶의 태도들이 나를 형성하는 줄기가 된다. 인생에서 제때 시점을 맞추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물밑에서의 쉼 없는 자맥질도 필요하다.

  인생의 중요한 길목에서 삶이 내게 요구하는 바를 행할 때 용기를 내려면 나 자신에게 부여하고 있는 격률을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 무한경쟁무대에서의 고달픈 시간들을 이겨내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유가 곧 정언명령이어야 하는 까닭이다. 한편으로 자유는 싸워서 쟁취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자유롭고 싶으면 용기 있게 나서라. 그리고 그 용기를 지유롭게 행하라.  (p. 77~84)

 

   -----------------

  * 홍시율 수상록 『마음을 여는 속도』에서, 2023. 5. 26. <굿웰스북스> 펴냄

 * 홍시율/ 경기 안성 출생, 2016년 계간 『문학의 봄』으로 등단, 시집『사람이 별이다』『사랑이 지나갔으므로 할 일이 많아졌다』『아무 쓸모 없는 가슴』, 에세이집『삶의 관성들 다시 읽기』『잃어버린 고양이에 대한 예의』『나를 안아줄 시간이다』등, 사색가, 문화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