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나는, 부처와 살았었다
정숙자
모든 정화작용은 시간이 주관하는 일인가보다. 온 가족이 한 지붕 아래 살았던 때가 전생이었던 것만 같다. 전생이란 꼭 죽어서 뒤돌아보는 시공이 아니라 바로 몇 년 전, 찰나에 뒤집혀버린 환경 저편에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다. 물리적인 차원의 죽음 다음에 오는 내생이란, 그것이 죽음 이전에 유추했던 내생인지 현생인지 과거 생인지 어찌 알 것이며, 안다 한들 천지간에 공감/공유할 누구도 없는 시냇가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먼 줄로만 알았던 나이 칠십이 이렇게나 후다닥 날아들었음과 같이 내생 또한 그렇게 바짝 붙어있었음이 아닌가! 맞다. 그렇다면 바로 오늘이 내생이라면 참으로 다행이다. 곰곰 굽이굽이 잘잘못을 헤아려보기도 하고, 한 뼘 남은 생을 가다듬을 수도 있는 이 시기야말로 단 한 번 주어진 재생 타임이 아니고 무엇이랴. 전생- 현생- 내생을 동시에 살아볼 수 있는 인디언 썸머, 즉 신의 마지막 선물인 것이다. 마음이나마 수선해야 할 때이다.
언제부턴가 어디선가 산문 청탁이 오면 ‘필히 써야지’ 하고 깊이 아껴두었던 속내가 있다. 그게 바로 저 윗줄에 내어 건 ‘나는, 부처와 살았었다’라는 명암이다. 배우자가 유명을 달리하고 나면 나빴던 일은 잊어버리고 좋았던 점만 생각하게 된다는 얘기를 왕왕 들어 왔는데, 그 역亦 참이라는 걸 증명하는 사유가 뜬구름 속에서 수시로 미풍을 보내온다. 예전엔 그토록 천불이 나던 속도 어느새 다 타버렸는지 머리털엔 재灰만이 새하얗다.
오래전에 읽어 출전이 떠오르지 않지만, 내용만은 예대로 푸르러 아하! 그때 그 경전 속의 설화가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만감에 싸여 자신의 일생을 되짚어 보곤 한다. 오래전에 읽어 출전이 떠오르지 않는 그 전설의 줄거리란, ···옛날 옛적 어떤 한 남자가 어느 산속에 가면 관세음보살을 친견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고 한다. 묻고 물어, 걷고 걸어 깊은 산에 이르자 날이 저물었는데 마침 기슭에 불빛이 있어 찾아들었는데,
하룻밤 신세를 지려 했으나 순식간에 몇 년을 살게 되었더라는 것이다. 마침 그 집에는 여인 혼자 살고 있었고 이런저런 말을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부부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운우지정雲雨之情 같은 건 염두에도 없이 몇 년을 살다 보니 남정네로서는 좀 지루하기도 하고, 예전에 살던 마을이 그립기도 한지라, 잠시 다녀오겠노라는 뜻을 비쳤더니. 여인이 만류하기는커녕 선선히 허락하여 남자는 마을로 돌아갔다.
하지만 남정네는 문득 관음진신친견觀音眞身親見의 꿈을 망각한 자신을 깨닫고는 다시 산을 향해 길을 잡았다. 이번에야말로 관음보살님을 꼭 뵙고야 말리라, 허위단심 그 산기슭에 당도했는데 웬일이란 말인가.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돌아선 남정네···. 망연히 멈추어 연못을 바라보자니 거기 그리운 얼굴이 비치는 게 아닌가. 아! 여인이 바로 관음觀音이었던 것이다. 반가움에 손을 내밀어 잡으려 했으나 물결이 흩어지고 말았다.
젊은 시절. 동서양의 문학·철학·경전 등을 한 권 한 권 바꿔가며 읽던 당시에는 저 남정네의 이야기가 내 초상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하지만 20·30·40·50·60을 지나, 오늘 70대에 닿고 보니 ‘사느니보다 죽는 게 낫다’ 싶었던 삶이 왜 나에게 주어졌는가를 어렴풋이 알 듯도 하다. 장차 행복만을 안겨주려니 믿었던 배우자가 하루 이틀, 한 해 두 해, 십 년 이십 년 세월이 쌓일수록 일一 부처가 아닌 천불千佛을 안고 살게 할 줄이야!
‘천불이 나다’와 ‘천불千佛’의 의미는 각각 다르다. 문장이 아닌 명사로서의 ‘천불’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겁劫에 각각 일천씩 나타난다고 하는 부처 중에서 현재에 나타나는 일천 부처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또한 ‘천불이 나다’는 ‘몹시 언짢아 속이 상하다’는 뜻이므로 현세불現世佛인 일천 부처가 다 도와야 할 정도의 심정을 은유한 전래적 시쳇말이 아닐까. “천불이 나다”는 몇 번을 외워봐도 뜨겁고도 아픈 비명이 아닐 수 없다.
“만일 당신이 죽으면 10분 후에 나도 죽겠다”라던 그, 왜 바로 죽지 않고 10분 후에 죽느냐? 물으면 “당신이 확실히 죽었는지 확인할 시간이 필요해서”라고 대답하던 그. 그리 살뜰한 마음도 점차 마모되어 내 속에 무던히도 ‘천불’을 질러댔던 그. 이제 그 애틋한 10분이 아니라 (나 홀로) 10년을 넘어 깨닫는 점은, 덕을 완비하고 상대를 편안케 해주는 사람이 부처가 아니라, 상대를 부처로 만들어주는 사람이 진정한 부처라는 회오이다.
epiloque
그가 안겨준 여러 종류의 시간과 고통이 아니었다면 나는 오늘에 이르도록 책을 읽거나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의식주를 해결해주었으며, 문학이라는 장르를 경외했다. 잦은 이사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집에 맞는 책장을 마련해주었고, 자녀와 집, 마지막에는 연금(!)을 남겨주었다. 나는 장롱 서랍에 결혼식 날 입었던 빨강 갑사 치마와 연초록 회장저고리를 간직하고 있다. 내가 죽거든 그 옷을 입혀달라고 유언할 참이다. ▩ (p. 204-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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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에』 2023-여름(70)호 <시에 에세이> 에서
* 정숙자/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공검 & 굴원』『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등, 산문집『행복음자리표』『밝은음자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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