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인간과 운명에 대한 원형의 깊이,『안티고네』/ 윤정구

검지 정숙자 2023. 5. 22. 02:19

 

    인간과 운명에 대한 원형의 깊이,『안티고네』

 

    윤정구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가 초연된 것은 기원전 442년 3월이라 하니, 지금부터 대략 2,500년 전 일이다. 1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남쪽의 반원형 노천극장 디오니소스에서 포도주와 연극의 신 디오니소스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하루에 4, 5편씩 나흘 동안 15~17편이 무대에 올려지고, 공정을 위하여 제비뽑기로 선정된 10명 내외의 심시위원이 예술성을 평가하고 관중의 반응을 참고하여 우승자를 가린 것을 상상하면, 얼마나 경이로운 선진의 모습인지 새삼 놀랍다.

  123편의 희곡을 집필하였고, 디오니소스 축제의 비극 부문 최다 우승 기록인 18번 우승자 소포클레스는 테베 3부작의 하나인 『오이디푸스 왕』에 이어 화해의 완결편이라 할 수 있는 『클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집필한 것이 89세였다 하니, 『안티고네』 발표 후 35년 만의 쾌거였다. 비운의 오이디푸스 일가의 해원解寃에 평생을 바친 셈이다. 

  비운의 주인공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는 늙은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통하여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죽인 마차의 주인이 아버지인 라이오스 왕이었고, 왕비 이오카스타가 어머니임을 알게 되었다. 왕비가 자살하고, 가혹한 운명에 울부짖던 오이디푸스는 황금 브로치로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되어 유랑의 길에 오른다. 왕비의 동생 크레온이 테베를 다스리게 된다. 크레온은 나라를 지키다 전사한 오이디푸스의 작은아들 에테오클레스는 후히 장사 지내고 조문토록 하였으나, 적군을 끌고 테베를 쳐들어온 큰아들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는 들판에 버리도록 하고, 조문을 금하는 엄한 포고령을 내렸다.

  『안티고네』는 성문 앞에서 안티고네가 동생 이스메네의 의견을 묻는 것으로 막을 연다. 죽음을 무릅쓰고 국가에서 금지한 큰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묻어줄 것인가, 아니면 국법에 따르고 말 것인가? 안티고네가 인간의 법 이전에 고귀한 자연의 법을 지키자고 강권하여도, 이스메네는 용기를 내지 못하고 성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연극은 코러스가 노래하는 부분(스타시몬)과 배우들이 연기하는 부분(에피소드)으로 나뉘는데, 코러스는 대체로 15명이 5명씩 세 그룹으로 나뉘어 오른쪽으로 몸을 향하여 춤추며 부르는 스트로페와 왼쪽으로 몸을 향하여 춤추며 부르는 안티스트로페, 그리고 관객을 향하여 정면으로 멈춰 서서 부르는 에포드가 무대를 생기 있게 꽉 채운다.

 

      이 세상에 경이롭고 무시무시한 것이 많지만/ 인간보다 더한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겨울 폭풍에 요동치는/ 잿빛 바다를 항해하며/ 양쪽에서 자신을 덮치는/ 높은 파도를 뚫고 나아간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재주가 많고 풍부한 기술 때문에/ 인간은 방금 선인이었다가 곧 악인이 되는구나/····· 타오르는 석탄불에 발이 데이고서야/ 인간은 자신이 눈멀었음을 알게 된다.   

      언어, 바람처럼 재빠른 사고, 국법에 대한 존중도/ 인간은 스스로 터득한다/ ·····그렇다, 인간은 온갖 재주를 다 부리고  있다/ ·····오직 죽음의 신에 대해서만은 아무리 애써도 도망칠 방도가 없구나.   

      운명의 힘은 무섭고 두렵기만 하구나/ 황금도, 무기도, 높은 성벽도/ ·····운명은 피하지 못한다/ 인간은 좋든 나쁘든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야. 

 

  『안티고네』는 선과 악, 어느 쪽으로든 빠져들 수 있는 인간이야말로 경이로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끔찍한 존재임을 경고한다. 어쩌면 비극은 인간적인 파멸을 통하여 운명의 한계 안에서 진정한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생은 연극이다'는 말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리스의 즐비한 대리석 조각을 보고 놀라던 젊은 날의 기억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곳곳에 남아 있는 둥근 기둥의 신전과 노천 원형극장들은 민주주의와 함께 위대한 문명의 자취로 자랑스럽게 다가왔었다. 그러나 인류의 지혜는 이미 그 시대에 오를 만큼 올라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경제적 파탄에 직면한 그리스의 현재, 그치지 않는 전쟁 등 인류의 어리석은 행동과 욕망, 그리고 미래를 알 수 없는 기술의 발전에 대한 우려 또한 가벼울 수 없었다. ▩ (p. 7)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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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집 · 서울』 2023. 3월(257)호 <고전에게 길을 묻다> 에서

  * 윤정구/ 경평택 출생, 1994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눈 속의 푸른 풀밭』『한 뼘이라는 적멸』등, 저서『한국현대시인을 찾아서』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