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 노트

독자의 탄생_문학의 신화와 역사, 그 너머(발췌 셋)/ 최진석

검지 정숙자 2023. 5. 18. 17:22

 

    독자의 탄생(발췌 셋)

         문학의 신화와 역사, 그 너머

 

     최진석

 

 

  독자는 자신의 존재감을 더욱 과시하는 자리에 올라선 듯하다. 온라인에 쉽게 만들 수 있는 블로그나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은, 사용 형식은 약간씩 다를지라도 독자 자신만의 공간으로 널리 활용되는 형편이다. 가볍게는 소소한 일상사를 기록하거나 일기처럼 매일의 글쓰기를 실천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며, 거의 학술 연구에 비견될 만한 지적 역량을 쏟아 내는 저장소로도 사용된다. 은근히 문학적 재능을 드러내면서 산문과 시, 에세이를 적는 것은 이제 딱히 비밀스럽거나 놀라운 광경도 아니다. 수동적으로 받아 읽기만 하던 입장에서 글쓰기의 자유를 마음껏 펼쳐 내는 위치로의 변화가 바야흐로 우리 시대의 독자의 위상이라 할 만하다. 별다른 의도 없이 SNS 공간에 쓰던 글을 유심히 챙겨 보던 출판사 편집자가 전격적으로 출간 제안을 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떠도는 것은, 이전 시대 작가의 신화와는 사뭇 다른 우리 시대의 신화 즉 독자의 탄생을 엿보게 해준다.24)  이전과 같은 의미의 독자는 사라지고 있다. 이제 독자는 비단 읽는 자일뿐만 아니라 쓰는 자이기도 하다. 여기서 글쓰기의 민주주의를 발견하고, 작가와 독자, 비평가를 나누던 근대적 분할선이 무효화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게다. 우리는 지금 '독자의 신화'가 탄생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가? (p. 31-32)

 

  '자연이라는 책'을 최초로 접했던 원초적 장면에서부터 인간은 어쩌면 독자로서 자신의 운명을 시작했을지 모른다. 라스코의 동굴벽화가 예술적 창조, 곧 쓰기의 근원적 풍경을 상징한다 해도 분명 의식적 존재인 인간의 출발점은 독자라는 존재에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고유한 문화적 성취로서 예술, 특히 문학이 쓰는 능력과 그 주체를 '작가'로 호명하며 신화화했다고 해도 거기에는 읽기라는 독자로서의 능력이 전제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의 신화가 발생하고 유지되었고, 또 사그라져 가는 (탈)근대의 시점에서도 독자라는 전제는 소거 불가능한 토대이며, 이제 그 사회제도적 위상마저 변모하는 중이다. 독자는 한편으로 문학이 성립하기 위한 근원적인 존재론적 근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문학 신화의 물질적 토대로써 기능해 왔고 이제 그 신화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되었다. 문제는 독자의 자리가 읽는 자에서 쓰는 자로 전위할 때, 이 변형을 '신화'로 부르게 만들 모종의 착시나 오판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p. 33-34)

 

  우리 시대가 마주한 독자의 위상 변동은 읽기와 쓰기의 역사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읽기의 즐거움이 쓰기의 성취감과 가시적으로 연결된 순간이 여기 있으며, 오랫동안 분리된 채 이어지던 쓰는 자와 읽는 자의 사회적 위계가 허물어지는 시간이 열리게 되었다. 모든 읽기는 쓰기의 준비 과정이고, 쓰기는 실상 읽기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활동이라는 독서의 존재론이 현행화된 시대라 말해도 좋겠다. 다만 읽고 쓰는 것의 결합이 선언적 명제를 넘어서, 현재 우리의 삶과 사회에 어떤 실질적 변화를 동반하는지 촉각을 곤두세울 필요도 있다. 책과 독서, 작가와 독자의 역사가 보여 주듯, 읽기와 쓰기의 미학적이고 신화적인 아우라 뒤편에는 자본과 국가라는 강제적 힘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의 탄생이라는 새로운 신화는 필경 읽고 쓰는 역사의 낯선 대목을 규정짓고 다른 방향으로 끌어갈 것이다. 하지만 낙관과 희망의 기대가 항상 보이는 그곳 그대로 우리를 인도하지만은 않는다. 바로 이것이 독자의 탄생을 낯선 시대의 서막으로 반기면서도, 그 결절점과 이면을 조심스레 따져 보려는 이유이다. (p. 35)

 

  24)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 역, 동문선, 1997, p.35.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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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파란』 2022-겨울(27)호 <issue 독자> 에서  

  * 최진석/ 2015년『문학동네』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 저서『사건의 시학』『감응하는 시와 예술』『사건과 형식. 소설과 비평, 반시대적 글쓰기』『불가능성의 인문학: 휴머니즘 이후의 문화와 정치』『감응의 정치학: 코뮨주의와 혁명』『민중과 그로테스크의 문화정치학: 미하일 바흐친과 생성의 사유』『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해체와 파괴』『러시아 문화사 강의』(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