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 노트

새로운 천사/ 이찬

검지 정숙자 2022. 12. 21. 00:56

 

    새로운 천사

 

    이찬/ 문학평론가

 

 

  지금  여기, 한국의 문학비평은 21세기 벽두에 사건의 자리를 담당했던 '미래파'와 '정치시'에 대한 평가 작업과 더불어, 이들을 잇고 있는 시인 · 작가들이 창안해 놓은 새로운 예술적 짜임을 갈피 짓는 작업에 착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저 예술적 짜임의 세부를 구성하는 낯선 이미지 조각술과 예술적 방법론을 산문적인 언어로 풀이할 수 있는 이론적 탐구를 가장 우선 수행해야 할 것으로 파악된다. 이와 같은 이론적 탐구를 통해서만, 매번 다시 구성되어야 할, 저 오래된 미래로서의 리얼리즘이라는 새로운 얼굴이 다시 거죽 위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루카치가 오랫동안 천착했던 미학적 방법으로서의 리얼리즘(realism)과 더불어, 자끄 라깡의 정신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 가운데 하나를 이루는 실재(the Real)의 공분모와 차이를 부단히 탐구하면서 리얼리즘의 새로운 이론적 모델을 구상해 볼 필요가 있을 듯 보인다. 어쩌면 이들의 공분모와 차이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와 새로운 해석은 미래 사회에 다시 새롭게 태어날, 전혀 다른 스타일의 리얼리즘을 생성하고 창안하는 기반을 제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만, 리얼리즘은 문학과 예술의 고정된 미학적 이념이 아니라 오히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사실성에 충실하게 천착하면서도, 법고창신의 에너지를 끊임없이 발산할 수 있는 생성과 변혁의 원천으로 자리할 것이 틀림없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들뢰즈의 사건적 개체성(hecceite)과 데리다의 에크리튀르(archi-ecriture), 그리고 바디우의 사건의 자리(Ie site evenement)가 더불어 형성하는 교집합과 분기점에 대한 이론적 천착이 필수 불가결한 것처럼 보인다. 더 나아가, 벤야민과 레비나스, 아감벤과 두셀이 공동으로 이륙하는 새로운 사유의 성좌, 곧 수동성과 무능력에 관한 철학적 탐구가 가장 시급한 과제로 요청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들에 대한 근본적인 천착이나 탐구 없이는 한국시를 그야말로 진리  사건의 차원에서 심층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길은 요원한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누가 알 수 있겠는가? 파울 클레의 그림을 통해 벤야민이 말하려 했던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가 어느 순간 우리 곁으로 내려와 예기치 않은 구원의 손을 내밀게 될는지를. (p. 586-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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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찬 비평집 『사건들의 예지』에서/ 2022. 10. 1. <파란> 펴냄

  * 이찬/ 1970년 충북 진천 출생, 2007년《서울신문》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 저서『현대 한국문학의 지도와 성좌들』『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시론의 계보』『김동리 문학의 반근대주의』, 문학평론집『헤르메스의 문장들』『시/몸의 향연』『감응의 빛살』, 문화비평집『신성한 잉여』, 2012년 제7회 김달진문학상 · 젊은평론가상 수상, 현)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