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본 어느 인문학자의 마지막 모습(발췌)
고재봉/ 인하대학교 강사
그 이유는 뛰어난 시읽기는 언제나 다른 사람과 다른 주체적인 생각, 독창적인 생각을 요구하는 까닭입니다. 나는 이 시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 시를 이렇게 읽는다는 태도가 시읽기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중략)··· 또 동시에 내가 읽는 방식과 다른 사람이 읽는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시어의 함축성, 다의성, 모호성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는 그같은 태도에 대한 요구가 전제되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선생님에게 '시 읽기란' 그런 것이었다. 판단과 해석이 무진장으로 열린, 흡사 젊은 시절 마음의 번뇌를 잊기 위해 밤새 홀로 헤맸다고 하는 중국 둔황의 사구沙丘처럼 망망히 펼쳐진 공간이었던 셈이다.
내가 발을 내딛고, 손을 뻗치는 모든 곳에 미세한 먼지가 쌓여 있었다. 길거리를 걸으면 신발의 무늬가 찍혔고, 호텔의 계단을 오를 때는 양탄자를 밟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작은 바람에도 사르르사르르 쓸리는 모래가 내 흔적을 하나하나 지우고 있었다.
- 홍정선, 「둔황으로 가는 길, 천세불변의 사랑을 꿈꾸는 여정」
마음 속으로 갈증을 덜기 위해 차라리 육체의 갈증을 선택한 것처럼, 선생님은 권위 있는 학설에 기댄 해석의 쉬운 길보다는 어렵더라도 스스로 선택한 나만의 해석을 소중히 여기셨다. 까닭에 심사장이나 토론장에서 선생님이 제일 경계하였던 것은 이론으로 문학을 얽어매는 해석이었다. 이러한 성향은 선생님의 독특한 여흥에서도 단박에 드러나는데, 선생님은 거의 모든 유명한 시를 외고 계셨다. 그리고 술이 한껏 오르고 기분이 좋아지면 사람들이 노래방에서 18번을 부르듯이, 소월이나 지용, 백석, 미당의 시를 낭랑하게 낭송하셨다. 흥이 잔뜩 오른 자리에서 노래 대신 진지하게 시를 읊조리는 장면에 아연 술자리가 숙연해져도 선생님은 참으로 기분 좋게 시를 낭송하셨다. 시를 읽고 끊는 호흡과 휴지가 모두 나름의 해석이 담겨 있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것은 문학이 사상을 담는 도구 이전에 꿈과 자유를 주는 것, 스스로 해석하고 생각할 권리를 만끽할 수 있는 이 시대 거의 유일한 수단이라는 지론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선생님은 문학에 관한 한 이 시절 보기 드문 낭만주의자였다.
선생님께서 만년에 자구 언급하셨던 책은, 전기 작가 스테판 츠바이크(StefanZweig)가 쓴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였다. 유럽의 종교개혁 시기 칼뱅의 광신적 교조주의에 맞서다 그 삶의 흔적조차 모조리 지워진 카스텔리오(Sebastion Castellion)의 삶이야말로 인문학이 가야 할 길을 조용히 웅변한다고 말씀하셨다. (p. 166-167)
※ 故 홍정선 평론가(1953~2022), 향년 6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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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2-10월(394)호 < 故 홍정선 평론가 추모사 2 > 에서
* 고재봉/ 인하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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