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으면 안되었던 신신당부(부분)
고정애
아버지는 1909년 봄, 장택고씨 농가에서 다섯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 이듬해는 한일병합조약으로 나라가 권리를 잃게 된 혼란기였다.취직도 어려운 척박한 벽촌에서 농사짓기보다 다른 길을 찾다가 도일을 감행했다. 열여덟에 근린에서 엄하기로 소문난 창원 황씨 맏딸인 동갑내기 어머니와 결혼한 뒤였다. 가방끈 짧고 재력도 배경도 없었지만 오직 젊은 혈기 하나로 현해탄을 건너 새로운 삶을 모색했다. (p. 446-447)
우체통
빨간 잠자리 빛 유니폼을 차려입고
붙박인 채 기다랗게 목을 빼고 서 있는
일곱 살 때부터 만나온
아! 하고 벌린 입
목을 지나 가슴 지나 뱃속으로
바스락 낙엽 소리 떨구는
그 소리 듣고서야 돌아오라
이르던 아버지가 생각나는
내 목만 한 그와 키 재기를 하면서
잠자리 맴을 돌아 서성이는
우 · 체 · 통
- 고정애 시집 『튼튼한 집』(문학아카데미, 2009)/ (p. 448)
아버지를 여읜 지 40년이 되었다. 키우시던 난초에서 아버지를 본다. 엄동설한을 꿋꿋하게 이겨내어 봄이면 삐죽삐죽 솟아나는 진초록 이파리가 건강하고 싱싱하다. 누구나 태어날 때 마음대로 부모를 선택할 수가 없다. 어느 부모에게서 태어나 어떻게 길러지느냐, 그것이 관건인데 오래 살고 보니 나는 엄청 제비를 잘 뽑았다는 결론이다. 이 말을 꼭 전해드렸어야 했는데 만시지탄이라 소용이 없다. 언제나 조용하고 말이 없던 분이었기에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모자이크처럼 이리저리 맞추어 본다. (p. 456=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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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예바다』 2022-가을(36)호 <나의 아버지 11>에서
* 고정애/ 1991년『시와의식』으로 등단, 시집『날마다 돌아보는 기적』『튼튼한 집』『연필깍이』『사랑 에너지』, 일역『105 한국 시인선』, 박제천 선시집『장자시莊子詩』, 한역 강상준『재일在日 강상중姜尙中』, 히구치야스유키『변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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